7화
“정말 이래야겠나.”
“……”
“이렇게까지 해야 할 만큼.”
박규상의 등 뒤로는 벨라가 서 있었다. 박규상을 향해 뻗어있는 하얗고 가느다란 팔. 그 끝에는 장전된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 만큼, 그 남자가 가치 있나.”
벨라가 쥔 권총이 박규상의 머리를 겨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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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가 권총으로 박규상을 내리찍었다. 총의 손잡이 부분이 박규상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자 뒷목과 턱을 몇 번 더 내리쳤다. 박규상은 완전히 기절했다. 벨라는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기계 장비에 다가갔다. 그곳에는 박규상의 통신 채널이 연결되어있었다.
즉시 승강장으로 전분을 송신했다. 벨라가 통제할 수 있을법한 비공정을 고르고, 그것에 이륙 허가를 내렸다. 이륙 시점은 3분 뒤로 잡았다. 벨라는 즉시 승강장을 향해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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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귀도 동굴 안에서는 이베흐와 토끼 인간들의 총알이 쏟아졌다. 그 모두가 나, 에반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이제 내가 믿을 것은 칼과 방패뿐이다. 나는 방패에 약간의 마력을 주입시켰다. 그러자 둥글고 맑은 보호막이 날 감쌌다. 토끼 인간들의 총알과 이베흐의 마법까지도 잠시 막아주었다. 방패의 내구성은 생각보다 훨씬 강력했다.
난 살길을 찾아 주변을 둘러봤다. 벽을 따라 있는 전구들과 그것들을 연결하는 전선이 있었다. 전선은 한켠에 있는 배터리에서 모아졌다.
즉시 판단을 내렸다. 작은 마법 탄환을 발사해 배터리를 뚫었다. 내부에 조명이 완전히 사라지며 총알들이 방향을 잃고 서로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이베흐는 자신의 보랏빛 마나로 동굴을 밝히려 했다. 동굴 전체를 밝힐 정도는 아녔지만 동굴 천장 어귀에 있는 나를 금세 찾아냈다.
도망가야 한다. 도망갈 길은? 보이는 건 내가 아까 걸어왔던 동굴 입구뿐.
정말 저기로 가야 하나. 다른 방법 없는 거야? 저 좁은 길을 통과하라고? 진짜로?
밖에 있던 미르도 상황을 눈치챘다. 동굴 안에서부터 메아리쳐오는 총성을 들었다. 미르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주변에 있던 토끼 인간들은 미르를 묶어두려 했다. 토끼 인간들이 미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날아온 총알이 미르의 가까운 토끼 인간들을 하나둘 쓰러트렸다. 하늘에는 비공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총을 쏘는 건 조준경에 눈을 가져다 댄 벨라였다. 총안구에 총을 내밀고 지상의 토끼 인간들을 저격했다.
이번에는 벨라의 비공정에서 미사일이 발사되었다. 미사일은 설귀도의 중심으로 향했다. 팔뚝만 한 작은 미사일이었지만 얼음동굴에 큰 진동을 만들며 동굴의 천장을 부숴버렸다. 내가 있던 동굴의 천장이 부서졌다. 햇볕이 동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주변이 갑자기 밝아지자 나도 이베흐도 토끼 인간들도 눈을 찌푸렸다.
하늘이 열렸으니 하늘로 도망가야 한다. 난 발밑으로 마력을 분사시켰다. 마력으로 활공한 적은 거의 없지만 이전에 팬텀이 날아다니는 건 몇 번 봤었다. 실패하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일단 몸을 띄웠다.
미르를 타는 것도 없이 혼자 활공한 건 처음이었다. 너무 많은 마력을 분사하자 속도를 주체하기 어렵게 몸이 앞으로 쏠려 나갔다. 동굴 벽에 한 번 부딪히고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이베흐는 능숙하지만 분노가 가득 찬 활공으로 쫓아왔다.
속도를 겨우겨우 제어하며 뒤를 돌아봤다. 나는 망망대해 하늘에 떠 있었다. 이베흐가 거의 발치까지 따라왔다. 이베흐가 신체 강화 버프를 사용했다. 그 버프는 몸에 있는 근섬유들을 활용하는 모양이다. 안 그래도 역삼각형으로 딱 벌어졌던 이베흐의 어깨가 더 우락부락해졌다. 제복이 터질 듯 팽팽하게 부푼 이베흐가 날 죽일 듯 노려봤다.
벨라의 비공정이 이베흐를 향한 공격을 시작했다. 비공정의 토끼 인간들은 발포를 망설였다. 하지만 벨라가 총으로 협박하자 결국은 명령에 따랐다.
비공정의 대공 포탑들이 이베흐를 인식하고 그를 향해 총알을 쏟아냈다. 이베흐는 보랏빛 보호막으로 총알들을 무리 없이 막아냈다. 총알들이 번쩍이는 불꽃을 남겨 이베흐를 조금 정신없게 만들기는 했다.
이베흐가 한 손을 펼쳤다. 남색의 불길 같은 마나가 타올랐다. 그것이 벨라의 비공정을 향해 날아갔다. 마나가 왼쪽의 포탑에 명중했다. 폭발한 포탑이 통째로 뜯겨나가 바닷물 속으로 떨어졌다.
미르가 나를 부르며 날아왔다. 이베흐는 다시 한번 비공정을 공격하려 했다. 난 그런 그를 막기 위해 몸을 던졌다. 이베흐와 부딪힌 나는, 발밑에 마력을 주입하며 활공상태를 유지하고 또 방패를 활용해 보호막을 띄웠다.
이베흐가 남색으로 빛나는 주먹을 뻗었다. 보호막이 막아줬지만 그 충격이 내 전신을 통과했다. 이베흐가 보호막 안쪽으로 파고들어 왔다. 보호막은 투사체나 마법은 막아주지만 이베흐의 몸을 막지는 못했다.
이베흐의 손이 내 옷깃에 닿으려 하자 나는 칼을 휘둘렀다. 칼날이 이베흐 근처의 남색 마나를 가르며 부드럽게 움직였다. 이베흐는 칼끝을 피하기 위해 몸을 뒤쪽으로 뺐다가 다시 한번 다가왔다. 보랏빛 마나가 이글거리는 이베흐의 주먹이 날아왔다. 방패를 끌어당겨 겨우 막아냈지만 이번 반동으로 나는 저 멀리 날아갔다. 한참 뒤로 밀려난 나는 해수면에 닿을락 말락 한 위치에서야 멈춰 섰다.
이제 상황은 이판사판이었다. 각자가 각자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대상에게 총을 쏘는 중이었다. 벨라의 비공정은 이베흐를 공격하고, 설귀도에 토끼 인간들은 나를 향해 대공포를 쐈다.
이베흐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손등으로 드러나는 핏줄에서 그 힘이 느껴졌다. 이베흐의 다음 공격이 임박했다. 그때 내 머릿속은 오만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지면 안 되는 거겠지? 근데 이긴 다음에는 어떻게 해?
이제… 이제 나는 도대체…
무언가가 나를 붙잡는 듯했다. 몸이 붙잡힌 게 아니라 나의 정신이 붙잡혔다.
초점을 이베흐에게 맞추려 해도 쉽지 않았다. 끝없이 시야는 흐려졌다. 마치 무언가가 나의 정신을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나의 시선은 이베흐를 향해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부서져 버린 설귀도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다시 설귀도를 바라보았다. 부서져 버린 설귀도의 천장 안으로 죽어 있는 드래곤의 사체가 보였다. 그러자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 것처럼, 또 다른 환영이 나의 시야로 파고들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나머지 감각들은 먹먹해졌다.
그것을 기억이라고 해야 할지, 꿈이라고 해야 할지, 도저히 표현할 방법을 못 찾겠지만 나는 이미 그 풍경 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닌 게 확실했다. 하지만 현실만큼이나 생생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와중에도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건 아주 오래 전의 과거였다.
드문드문 보이는 높은 나무가 그곳이 원래 울창한 숲이었음을 보여줬다. 하지만 숲의 상당 부분이 불에 그슬려 그 경계가 마치 찢어진 종이와 같았다.
그을린 숲 한가운데 있는 거대한 석조 요새가 있었다. 요새의 하늘에는 결의에 찬 엘프들이 가득했다. 요새의 성벽과 발치에, 두꺼운 갑옷과 커다란 양손 검을 들고 대열을 갖춘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시그너스 기사단으로 보인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커다란 규모였다. 이 세계의 모든 엘프와 기사단을 전부 끌고 왔다고 해도 믿을 것만 같았다.
반대편의 하늘이 열렸다. 검은 빈틈이 벌어지자 박쥐의 날개와 두 개의 뿔을 가진 인간들이 쏟아져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얼핏 봐도 인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피부가 창백한 푸른빛을 띠었고 손끝에는 메이스나 묵직한 도끼를 쥐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양옆으로 갈라지는 장발의 남성이 나타났다. 보랏빛으로 빛나는 방패와 손도끼를 들고 반대편의 엘프들을 바라봤다.
창백한 푸른 피부를 가진 그 남자가 날개를 펼쳤다. 마치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제거된 사람처럼 적들을 향해 날아갔다. 그의 적은 엘프와 기사단이었다.
두 거대한 세력이 부딪혔다. 엘프들과 박쥐 날개를 가진 종족들이 하늘에서 뒤엉킨다. 하늘에서 죽어 나간 이들은 생명력을 잃은 날벌레처럼 힘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드넓은 하늘에 전장은 어디가 끝이고 어디가 시작인지도 보이지 않았다.
이내 그곳에 있던 모든 이들이 전투에 휘말렸다.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가 고성을 내지르며 자신의 무기를 휘둘렀다. 근데 나는, 지금 그 한복판에 있는 나는,
도대체 어느 편이지?
일순간에 모든 환영이 사라졌다. 이제야 눈앞의 이베흐가 또렷하게 보였다. 난 홀린 듯 칼끝을 치켜들고 이베흐를 겨누었다. 그러자 미르를 주변으로 거대한 원형의 마법진이 열렸다. 그 마법진 주변에 4개의 마법진이 추가로 열렸다. 각각 푸른색, 연두색, 노란색, 붉은색이었다. 미르의 머리에 있는 문양에서 생각 밖의 마력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마치 팬텀에게 맞설 때처럼, 하나의 정연한 문장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조디악의 생각은 합일에 관한 것이다.
각 마법진에서 뿜어진 마력 기둥이 미르와 중심 마법진으로 회오리치고, 생전 본적 없는 거대한 마력포가 발산되었다. 마력포는 하늘을 갈라버릴 듯 맹렬하게 나아갔다.
이베흐는 팔을 들어 그 힘을 막아내려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마력포는 보호막을 가뿐히 뚫고 이베흐의 몸을 스쳤다. 명중당한 이베흐는 몸이 축 처졌다. 그의 주변에서 느껴지던 마력도 사라졌다. 그는 활공하는 힘을 잃고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는 부상을 입은 건가. 확인하고 싶지만 넓은 바다를 배경으로 추락하는 그의 모습은 알아보기 어려웠다.
이베흐를 향해 날아가려는데, 벨라의 비공정이 날아와 나를 가로막았다. 그녀는 작은 창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소리쳤다. 즉시 피해야 한다고 했다. 빨리 비공정에 올라타라고 했다. 난 정신을 차리고 비공정으로 향했다. 미르도 함께했다.
난 비공정 갑판에 간신히 착륙했다. 미르도 갑판을 발톱으로 움켜쥐며 균형을 잡았다. 벨라가 내게 달려왔다.
내가 벨라를 향해 물었다.
“이베흐는?! 어떻게 됐어?!”
“바다로 떨어지는 건 제가 확인했습니다!”
“괜찮은지 확인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일단 빨리 복귀해야 합니다! 어차피 지금 에반 님의 실력으로는 이베흐를 잡을 수 없습니다!”
엥. 잡을 수 없다고? 방금 공격이 이베흐한테 먹혀들었잖아. 그럼 이긴 거 아니야?
이럴 때일수록 결판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벨라는 극구 반대했다. 벨라는 나를 선실로 끌고 들어가며 말했다.
“이베흐가 그 정도로 약해 빠진 줄 아십니까?! 이베흐는 장거리 텔레포트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가 살아있다면 이미 텔레포트로 빠져나갔을 겁니다!”
난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비공정이 방향을 틀었다. 목적지는 이베흐의 기함, 우리들의 사령부로 설정되었다.
방금까지 내 몸을 타고 흘렀던 엄청난 마력도 씻은 듯 사라졌다. 미르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힘도 사라졌다. 내 몸은 설귀도로 가기 전 상태로 돌아왔다.
방금까지의 일들이 믿기지 않았다. 내가 방금… 이베흐랑 싸웠던 거야? 그 이베흐랑? 앞서서 본 환영들은 다 뭐였지? 내가 보면 안 되는 걸 봐버린 건가? 칼을 쥔 손에는 아직도 힘이 바싹 들어가 있었다.
근데 이베흐의 부하들은? 그 부하들도 이제부터는 나의 적이야? 아까 분명 이베흐 주변의 토끼 인간들도 나를 향해 대공포를 쐈다.
나는 지금 타고 있는 비공정 내부를 돌아봤다. 이곳에도 토끼 인간들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적대감을 표시하는 녀석은 없다. 그들도 놀랐는지 큰 눈을 사방으로 굴렸다.
조종실을 한번 확인한 벨라가 도로 내게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어…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