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최근 한동안 믿기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왔다. 난 돼지 목장의 아들이었다. 돼지들과 대화할 수 있다는 점이 있기는 했지만 그 외 딱히 특별한 재능은 없었다.
그저 그렇게 살아오던 내가 드래곤 알을 발견했다. 얼마 안 가 도적단 ‘부송사’가 빅토리아 아일랜드에 치고 들어왔다. 부송사가 돼지 목장과 마을을 완전히 파괴하면서 우리 가족은 더 이상 그곳에서 살 수 없었다. 나는 블랙윙의 도움을 받았다. 정확하게는 벨라 상사와 이베흐 원수의 도움을 받았다.
아직도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베흐는 날 여러모로 애지중지했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빅토리아 아일랜드를 탈출했다. 그 과정에서 드래곤이 부화한다. 그 드래곤은 자신을 ‘미르’라고 불렀다. 미르는 내가 어딜 가던 항상 주변을 맴돌며 따라왔다. 이제 미르는 나의 분신처럼 익숙하다.
블랙윙의 인도를 따라 난 에델슈타인에 다다랐다. 난 이제 블랙윙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그에 따라 오르카 님을 알현했다.
오르카는 언뜻 보기에는 작고 어린 소녀였다. 그 작고 약해 보이는 손과 순수해 보이는 보랏빛 눈이 이 거대한 도시를 움직였다. 오르카는 새하얀 머릿결을 트윈 테일로 묶고 있었는데, 그녀가 차고 있던 토끼 모양 머리 끈이 기억에 남는다.
나는 오르카와 함께 팬텀에게 맞서게 된다. 오르카는 겉보기와 다른 강력한 마력으로 팬텀을 제압했다. 팬텀을 제압한 건 오르카였지만, 그녀는 모든 공로를 나에게 넘겼다. 그 결과 나는 한 단계 높은 계급과 훈장을 갖게 되었다.
생각해보건대, 오르카는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 맞다.
그런 어린 나이에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도 그렇고. 거기에 팬텀을 한 방에 쓰러트리는 막강한 힘까지. 내가 오르카 나이대에는 도대체 뭘 했더라. 내 자신이 한심해진다. 빅토리아 아일랜드 전체를 다 돌아봐도 과연 오르카 정도의 마법사가 있을까 싶다.
“오르카 님은 도대체 몇 살이신 거야?”
난 벨라에게 물었다.
벨라는 빅토리아 아일랜드 때부터 지금까지 날 도와준 블랙윙 군인이다. 내 질문 공세가 귀찮을 법도 한데 나름 꼼꼼하게 대답해준다.
벨라가 대답했다.
“글쎄요.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일단 100살은 넘겼을 겁니다.”
“어?”
아니 그 여자애가…? 기껏해야 내 나이쯤으로 보였는데.
“오르카 님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렇구만.”
“원래는 일종의 정령이셨죠. 그러다 운 좋게 육체를 얻어 저런 군주에 등극할 수 있었습니다.”
정령이라니. 빅토리아 아일랜드의 엘리니아에서 정령에 관한 정보를 몇 번 들었던 적이 있다. 정령이 실존했구나.
생각해보면 엘프와 팬텀도 실존하는 세상이잖아. 그럼 사람 닮은 정령 정도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거겠지. 딱히 놀랍지도 않다.
“근데… 저거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거?”
벨라가 손끝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미르 말입니다.”
나는 미르를 돌아봤다. 내 옆에서 날고 있던 미르도 영문을 모른다는 표정으로 벨라를 바라봤다.
“뭐가 어때서?”
“좀… 커진 것 같지 않습니까.”
미르는 부화 직후부터 내 몸 근처를 절대 벗어나지 않고 아주 딱 붙어 다녔다. 미르가 내 시야 밖으로 나가는 일은 절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미르의 신체 변화에 관해서는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벨라는 나만큼 미르와 자주 같이 있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몸에 생겨버린 차이를 알아챈 듯했다.
“커졌다고?”
나는 미르의 배를 주물거렸다. 도마뱀 피부 같은 질감이 느껴졌다. 내 손과 미르의 배를 비교해보니 확실히 커진 것도 같다.
근데 이건 당연한 거잖아?
“미르는 아직 애기잖아. 애기들은 크는 게 맞지.”
“…그렇죠?”
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대로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이상한 기분에 눈을 떠보니 난 차가운 철재 벽과 단단한 살덩이에 끼인 상태였다.
“마스터… 내 몸이 이상해…”
그 거대한 살덩이는 미르였다.
팔로 미르를 쭉 밀쳐냈다. 미르는 침대 아래로 풀썩 떨어졌다.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는데, 덩치가 3배로 사이즈업 된 미르가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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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는 날개와 팔, 다리, 꼬리가 훨씬 커졌다. 머리통만 하던 미르는 이제 내 상반신 크기쯤이 되었다. 꼬리까지 다 합친다면 내 키보다 클지도? 거기에 눈매도 좀 더 사나워지고 뿔도 더 자랐다. 목소리도 살짝 굵어진 느낌이 든다.
안 그래도 블랙윙 병사들의 시선을 끌던 미르였다. 몸이 커지니 이제 더 분명한 존재감을 가지게 되었다. 다음날 식당에서 벨라를 만나자 그 턱이 살짝 벌어졌다.
“…애기들이 원래 이렇게 빨리 크는 건가요.”
“그… 그런가 봐.”
커져 버린 미르였지만 하는 행동은 거의 똑같았다. 여전히 내 주변을 딱 붙어서 날아다녔다.
날갯짓이 만드는 풍량에 내가 날아가 버리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런 걱정은 필요 없었다. 날개의 힘과 마법의 힘을 섞어서 날고 있었기 때문에 날갯짓이 거세지 않았다.
엘프가 해안으로 몰려나자 더 이상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엘프도 격퇴하고 가족들도 안전하고. 거기에 미르도 잘 커가고 있으니 한동안 평온한 일상이 흘러갈 것 같았다.
하지만 블랙윙은 나를 가만 냅두지 않았다. 얼마 안 가 이베흐가 시원시원한 미소를 지은 표정으로 내 집무실에 들어왔다.
“에반 님. 기다리던 출정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백발이 섞인 올백 머리에는 윤기가 흐르고 항상 쓰고 다니는 선글라스가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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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흐는 우리가 엘나스 인근으로 향할 거라고 했다. 벨라의 안내를 따라 항구로 나갔다. 그 항구는 엘프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분위기가 많이 누그러진 곳이었다. 물자를 나르는 차량 행렬이 어수선하긴 했지만, 일상적인 분위기의 햇살과 바다가 주는 특유의 해방감이 느껴졌다. 미르도 그런 느낌이 좋았는지 날개를 더 크게 펄럭이고 좀 더 높게 날아올랐다.
계절은 가을을 지나 조금씩 추워지던 중이었다. 바닷바람까지 더해져 피부에 닿는 추위는 더 심해졌다. 벨라와 난 제복을 단단히 조여 입고 항구로 나아갔다. 미르는 추위를 안 타는지 맨몸으로 날아다니는데도 멀쩡했다.
이번 출정을 함께할 함선들이 바다를 가득 메웠다. 토끼 인간들과 안드로이드 로봇들이 차량에서 물자를 내리고, 바다 위에 착륙한 비공정에 적재하는 일을 반복했다.
“근데 벨라?”
“네.”
“우리가 에델슈타인을 비워도 되는 거야? 아직 엘프들이 해안에 남아있다며.”
벨라는 딱히 대꾸도 없이 항구로 걸어갔다. 이 항구에는 엘프가 안 보이지만 서쪽 해안 상공에는 아직도 엘프들이 떠 있다고 한다. 그들은 더 이상 이곳에서 얻을 게 없는데도 어째서인지 떠나지 않고 계속 근처를 맴돌았다.
벨라는 분주한 항구의 광경을 천천히 훑어보고는 말했다.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이베흐 님께서도 딱히 말해주시는 게 없으니까요. 근데 이베흐 님이 이렇게나 급히 움직이시는 걸 보면, 엘프들을 내쫓는 거보다 중요한 임무가 있는 거겠거니 할 뿐입니다.”
“음…”
이베흐는 우리보다 계급이 높다. 당연히 정보도 많을 거다. 상식적으로 그가 우리보다 훨씬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거다. 해안의 엘프들이 큰 위협이라면 출정을 결정하지도 않았겠지.
아마 이번에도 우리의 탑승 순서는 한참 나중이겠지? 아마 그럴 거다. 토끼 인간이나 안드로이드를 실은 수송선들도 아직 한가득이니까.
“따라와 보시죠. 천천히 구경시켜 드리겠습니다.”
벨라는 나를 붙들고 항구의 다른 영역으로 이동했다. 미르는 탁 트인 항구의 풍경을 돌아보면서 뒤따랐다. 구경이란 말을 썼지만 그것도 일종의 교육이었다. 이동한 구역에서는 거대한 장비들을 나르고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총구 4개가 달린 커다란 기관총이었다. 아래에 바퀴가 달리긴 했지만 움직이면서 쏘는 물건은 아닐 거 같고, 뒤편에 달린 갈퀴를 땅에 고정해서 쏘는 총 같았다.
“저런 총은 뭐에 쓰는 거야?”
“대공포입니다. 하늘에서 다가오는 적들을 막기 위한 총이죠.”
항구에 설치된 크레인이 대공포를 케이블로 묶었다. 그리고 하나씩 짐칸에 실었다. 짐칸 하나에 대공포 6개가 가지런하게 들어갔다. 그 짐칸은 다른 차량이 아니라 장갑차에 연결시켰다. 장갑차가 시끄러운 엔진음을 내며 무기들을 옮겼다.
총들이 이동하자 그다음에는 포탄들을 볼 수 있었다. 손가락 길이부터 팔뚝보다 두꺼운 것도 많았다. 심지어 그 커다란 포탄도 사실 포탄의 탄두 부분만 따로 옮기는 중이었다.
“탄두와 탄약을 한 번에 옮기면 부피와 무게 때문에 비효율적입니다. 저 둘을 조립하는 건 발사 직전 병사들의 몫입니다.”
덩치가 좋은 토끼 인간들도 포탄을 옮기는 게 힘들어 보였다. 복슬복슬한 털 밑에 있을 깊은 근육 라인이 꿈틀거렸다.
벨라는 이외에도 다양한 무기들을 소개시켜줬다. 무기 명칭들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지만 모양새와 용도를 매칭시킬 수 있는 정도는 될 것 같았다. 난 그런 무기들의 모습을 시그너스 기사단이 사용하는 것들과 비교해보았다.
시그너스 기사단들도 비공정을 운영하긴 한다. 하지만 기사 개개인은 칼, 창, 스태프 등 작은 무기로 무장한다. 대여섯 명이 달라붙어야 겨우 운영할 수 있는 저런 총이나 대포를 사용하지 않는다. 시그너스 기사단의 비공정에도 무기가 달려있지만 기껏 해야 마법 탄을 쏘는 주포 2개가 끝이다. 블랙윙 비공정은 측면에 총구만 수십 개가 넘고 크고 작은 미사일 발사관이 곳곳에 숨어있었다.
과연 블랙윙과 시그너스 기사단이 맞붙는다면 어느 쪽이 더 유리할까. 세계의 최강자는 당연히 시그너스 기사단이라고 여겨 왔는데, 블랙윙 함대의 위세를 보고 있자면 또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장비들을 구경시켜주던 벨라가 어떤 남자를 가지런히 뻗은 손으로 부드럽게 가리켰다. 저만치에서 어느 인간 남성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주변에는 크고 작은 키의 인간 군인들을 거느린 상태였다. 모두 검은 제복을 입은 상태였다.
그가 점점 다가올수록 그의 계급장이 뚜렷하게 보였다. 3개의 별이 달려있었다. 이전에 들은 황세준과 같은 계급이었다. 하지만 그는 황세준이 아니었다. 재빨리 그의 이름표를 확인하니 ‘박규상’이라고 적혀있었다.
박규상은 키가 작았다. 각진 어깨와 두꺼운 팔뚝 때문에 단련된 몸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고 얼굴빛은 차분하고 얌전했다. 그의 이목구비는 상당히 동안이었던지라 그를 젊은 청년이라고 착각할 뻔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본 그의 얼굴 위에 잔주름이 많은 걸 보아 그는 중년 이상의 나이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내게 악수를 권했다. 나도 얼떨떨하게 손을 뻗었다. 검은 제복 소매 끝에 나와 있는 두 손이 서로 맞잡았다. 그것을 지켜보던 벨라가 나 대신 나를 소개해줬다.
“이분이 에반 중령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하자 박규상을 뒤따르던 병사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나도 곧장 그것을 눈치챘다. 내가 뭘 잘못한 건가.
영문을 모르던 나를 대신해 벨라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정황상 그것은 사과의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박규상도 그에 따라 응수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박규상이 한 걸음을 옮겼다. 내 옆에 날고 있던 미르에게도 손을 뻗었다. 미르가 작은 손을 내밀어 박규상과 악수했다. 악수를 주고받는 박규상의 표정은 밝았다. 하지만 눈가 주변에 있는 잔주름들 때문인가. 그의 미소에서는 왠지 모를 공허함이 느껴졌다. 그것이 그저 외견상의 특징일 뿐인지 내면의 상태를 반영한 건지는 알기 어려웠다.
박규상이 다시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에반 중령의 공로가 부대 안에 유명해서 나도 포상을 하나 준비했는데, 지금 건네줘도 괜찮겠나.”
웬 포상? 벨라가 대신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뒤에서 어느 장교 한 명이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두꺼운 가죽 벨트 같은 물건이 들려있었다.
그것을 이어받은 박규상이 직접 그 물건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뭐죠?”
“안장이야. 드래곤 안장.”
“아…”
안장이 뭔지는 알고 있다. 동물의 등위에 올라타기 수월하기 위해 사용하는 간이 좌석 같은 느낌이다.
에델슈타인에서 만들어진 물건답게 만듦새가 좋았다. 안장은 푹신하면서도 튼튼하고 물기가 스밀 틈이 없이 꼼꼼했다. 길이 조절 끈도 넉넉하게 있어서 미르의 몸에 안 맞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지 않았다. 미르도 관심을 가지며 얼굴을 들이밀고 냄새를 맡았다.
“이전에 드래곤 말목을 붙잡고 날아다녔다는 소리를 들었어. 용감한 행동이지만 겉보기에는 우습기도 하니까. 이제 드래곤 몸집도 커진 김에 안장을 써보는 게 어떻겠나.”
이 박규상이라는 사람은, 오늘 나를 볼 거를 생각이 미리 이런 걸 준비해둔 건가. 심지어 드래곤이 없는 에델슈타인에서 드래곤 안장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거다. 아마 주문 제작? 대충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겠지.
좀 더 격하게 감사를 표현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말솜씨가 빈약한 나는 적당한 표현을 떠올리지 못했다. 결국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일관하고 말았다.
“가, 감사합니다.”
박규상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박규상이 다시 한번 악수를 청했고 나는 최대한 태연한 내색을 하며 그 손을 잡아 흔들었다.
이베흐의 비공정 하부가 열렸다. 수륙양용 장갑차들이 비공정과 육지를 왕복하며 병사와 장비를 운반했다. 반나절 동안 진행된 작업 끝에 우리도 비공정에 올라탔다. 이전에도 몇 번 타봤던 이베흐의 기함이었다. 박규상은 박규상 자신의 기함을 향해 따로 이동했다. 나, 벨라, 미르 셋이서 함께 복도를 걸었다.
비공정 내부에 있는 병사들의 수는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토끼 인간이나 안드로이드 로봇들 말고도 인간 군인의 비중이 높았다. 이렇게 밀도 높게 들어찬 비공정 내부는 처음 봤다. 그것도 이 비공정 한 척 안에 말이다. 덕분에 내 옆을 날던 미르의 날개가 인파에 툭툭 부딪혔다.
바다 위에는 비공정들이 수십 척 있었으니 그 규모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수만? 수십만 명은 되지 않을까?
비공정 제일 아래층에 포탑이 달린 차량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또 그런 층이 여럿 있으니 그 수가 가늠이 안 갔다. 심지어 몇몇 층에는 총이나 탄환을 생산하는 컨베이어 라인까지 있으니, 자원만 충분하다면 그 규모는 점점 커질 것이다.
벨라가 비공정의 내부 지도를 건네주었다. 지도는 각 층별로 총 6장이 있었다. 그 안에는 내 개인실도 표시되어있다. 내 개인실은 내 손톱보다도 작은 크기로 그려졌다. 이 지도를 다 외우는데도 며칠이 걸릴 거다. 아직 나는 벨라의 안내를 받지 않으면 함선 내부를 홀몸으로 돌아볼 수도 없었다. 잘못하다간 길을 잃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그러고 살 수는 없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 지도를 외울 거다. 적어도 나 혼자 둘러볼 수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어.
벨라와 나는 개인실로 이동하는 길에 계속해서 대화했다.
“이거 다 외우는 데 며칠이나 걸릴까.”
“에반 님 머리로는…”
“……”
“……”
대답을 기다리는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도대체 며칠을 예상하는 거야.
“지도도 지도이지만, 에반 님은 배워야 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또 어떤 거?”
“싸움의 기술이죠.”
그러면서 벨라는 앞으로의 일정을 대충 소개해주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마냥 노실 수는 없을 겁니다. 이제껏 에반 님이 한 번도 제대로 된 훈련을 안 받으셨기 때문에 부대에서 걱정이 많습니다.”
이전에 내가 해야 할 일을 벨라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그때 벨라는 딱히 아무것도 할 게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나도 이래저래 바빠질 예정인가보다.
“무엇보다 얼마 전에 에반 님이 멋대로 전선으로 출발해버린 사건으로, 에반 님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말이 더 많아졌죠.”
“그, 그렇구만.”
“앞으로는 에반 님은 아는 게 거의 없으니 정말 기초적인 것부터 교육받을 겁니다. 특히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전투 기술들이 필요합니다.”
함선의 적재 작업이 모두 종료되었다. 함선에 달린 6개의 엔진이 아래쪽을 향하고 불길을 뿜으며 해수면을 밀어냈다. 바닷물이 사방으로 튀며 함선이 조금씩 떠올랐다.
함선이 이륙한 바로 그날부터 나에 대한 훈련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