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소설] 에반 키우기 2 (2)
2화
다시 벨라를 돌아봤다. 이런 기다림이 익숙한지 아무 감정도 없는 마네킹처럼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양손은 허벅지 위로 잘 모아졌고 허리도 곧게 펴진 채로였다.
그때부터는 바닷물 너머 육지를 구경하며 시간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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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의 말처럼 3시간여가 지나자 안드로이드와 토끼 인간 한 쌍이 와서 우리에게 경례를 하고 길을 안내했다. 장갑차에 이런저런 장비들과 함께 실려서 해변까지 둥둥 떠갔다.
장갑차로 바다를 가로지를 때는 주변에 떠 있는 배들이나 하늘을 메우고 있는 비공정들을 구경했다. 육지에 도착하자 그때부터는 이베흐와 따로 움직였다. 나, 미르, 벨라, 운전을 담당하는 토끼 인간. 이렇게 넷이서 작은 자동차를 타고 이동했다.
빽빽한 도심에는 자동차가 쉬지 않고 오가고, 틈틈이 지나가는 전동기차에는 사람이 가득 타 있었다. 매초 이동하는 물동량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빅토리아 아일랜드의 가장 큰 시장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덕분에 이동하는 내내 눈이 심심한 일은 없었다.
우리는 도심 지역을 가로지르며 점점 내륙을 향해갔다. 화려한 번화가를 지나 몇 분 더 이동하니 좀 무거운 분위기를 한 철책 담장이 나타났다. 토끼 인간들의 경례를 받으며 차는 철책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철책 안에는 사다리꼴 모양의 구조물들이 듬성듬성 있었다. 10평도 안 될 것 같은 크기에 작은 구조물이었다. 그중 한곳 앞에 차가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벨라가 그 사다리꼴 구조물의 문을 열었다.
그 구조물은 벙커의 일부였다. 지상에 노출된 사다리꼴 구조물은 벙커의 입구고, 지하로 이어지는 구멍과 사다리가 있었다. 벨라와 함께 사다리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미르는 날개 덕분에 사다리를 잡을 필요 없이 부드럽게 하강했다.
그 내부 공간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다. 좁은 복도와 줄줄이 이어진 방들이 있었다. 그 복도에는 토끼 인간들이 오갔다. 대화를 하거나, 어슬렁거리거나, 무기를 손질하며 시간을 보냈다.
벨라는 어느 작은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이곳이 에반 님의 집무실입니다.”
천천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가구는 최소한으로만 보였다.
일단 금속 재질의 탁자와 그 뒤에 있는 의자가 보였다. 그 의자는 지금까지 본 차갑고 딱딱한 물건들과 달리 가죽 재질의 고급스러운 물건이었다. 천천히 걸어가서 그 위에 앉아보았다. 푹신한 쿠션감이 내 몸에 감싸졌다.
오, 좋은데. 이런 의자는 비싸서 한 번도 못 써봤다.
“앞으로 이곳에서 근무하게 될 겁니다. 근무 시간은…”
음… 근무라.
“나 여기서 일해야 하는 거야?”
벨라는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그럼 이 모든 게 공짜로 주어지는 줄 아셨습니까.”
“그건 좀 그렇긴 하지.”
“근무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입니다. 근무 이후에는 가족분들이 있는 숙소에서 지낼 수 있을 겁니다. 가족분들은 미리 숙소로 보내드렸습니다.”
“오… 고마워.”
의자에 편하게 기대있던 나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뭔지는 몰라도 나에게 일을 시킬 생각 같으니 나름 최선을 다해 임해야 하겠지. 특히 첫날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래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뭐야?”
“……”
벨라에게 물었지만 벨라는 대각선 측면을 멍하니 바라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왜 그러지. 할 일이 엄청 많나. 아니면 말할 엄두가 안 날 정도로 어려운 건가. 침묵이 만드는 중압감에 조용히 앉아서 벨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침내 벨라가 입을 열었다.
“글쎄요. 아무것도요.”
“아무것도?”
“네.”
“그게 무슨 소리야.”
“할 일이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정말 말 그대로였다.
“이베흐 님에게서 따로 전해 들은 게 없습니다. 애초에 에반 님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뭘 시키는 게 불가능하긴 하죠.”
“그렇지?”
“그럼 일단 그냥 가만히 있으세요. 앞으로 교육이나 직무 관련해서는 이베흐 님께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가죽 의자에 편히 기대었다. 천장에 달린 전등은 촛불보다 몇 배로 밝은 빛을 촛불보다 훨씬 일정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확실히 빅토리아 아일랜드의 생활 환경에 비한다면 이곳이 몇 배로 좋다. 아마 이 자리도 좀 더 중요한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닐까. 시간과 공간이 낭비된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벨라가 짧은 경례를 하고 몸을 돌렸다. 벨라가 떠나고 벨라의 말처럼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시계를 별생각 없이 바라봤다. 시곗바늘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
미르도 이런 정적인 공간이 처음이라 멀뚱멀뚱 빈 벽을 바라봤다. 지루함이 가시지 않자 자리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왠지 근무 중에 집무실을 벗어나면 안 될 거 같고, 집무실에 있는 이런저런 물건들을 만져보았다.
사실 방 안에는 뭐가 없었다. 총기를 넣어두는 수납장과 테이블 위에 있는 전화기가 거의 전부다. 탁자의 서랍들도 열어봤지만 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전화기도 어디로 연결된 상태인지 모르겠다.
미르도 이내 흥미를 잃고 탁자 위에 얌전히 앉았다.
…잠이나 잘까.
다시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내일부터는 9시까지 출근한다고 했는데, 그럼 매일 여기서 9시간을 버텨야 해?
내일부터는 뭘 하고 시간을 보낼지 알아봐야겠다. 의자에 몸을 완전히 의지하고 힘을 빼며 서서히 잠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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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좀 더 생각해봐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당장 내가 이 드래곤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하다못해 에델슈타인 해안에 있던 두껍고 삼엄한 해안 진지는 도대체 무엇과 맞서기 위해서일까. 블랙윙은 뭐가 무서워서 집무실 같은 시설들을 지하화하고 촘촘한 복도로 이어놨을까. 그 정도는 생각해볼 만했다.
하지만 그런 의문들은 손 틈 사이 모래처럼 빠져나갔다. 딱히 급한 문제 같지도 않았고, 이제와서 고민한다고 의미 있는 성과가 나올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지금 내게 보이는 풍경은 다소 휑한 집무실과 파닥거리고 있는 미르가 전부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고민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법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일상은 딱 13분 동안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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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잠에 든 나의 의식은 반쯤 깨어있고 만쯤 먹먹해진 상태였다. 그에 따라 마치 꿈처럼 느껴지는 여러 감상들이 머릿속을 이리저리 오가고 있었다.
“……”
“……”
“왜에-에에엥-”
“……?”
갑자기 문밖에서 높고 긴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풍선에 바람 빠지는 소리인지, 나중에는 잘못 불어버린 피리 소리 같기도 했다. 그러다 점점 불쾌하고 큰 소리로 변해갔다.
난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천천히 눈을 떠보았다. 미르도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천장에 달린 조명의 불빛이 어느샌가 붉은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혹시 내가 뭘 잘못했나.
내가 이상한 버튼을 눌러버리거나 한 게 아닐까. 테이블 위에 있는 전화기를 들었다가 놓아보았다. 하지만 붉은 조명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나중에는 아예 알람 시계에서 일어나는 때르릉거리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그건 사이렌이었다. 붉은색 조명이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며 신경을 안 쓰려야 안 쓸 수가 없는 상황이 일어났다. 문밖에서는 누군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상황 파악을 전혀 못 하던 나와 미르는 문 근처로 다가갔다. 하지만 왠지 문을 열고 나갈 엄두는 나지 않아서, 나도 미르도 그저 문 앞에서 멀뚱거릴 뿐이었다.
그러자 문이 밖에서 먼저 열렸다.
“우왓.”
“……”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벨라였다. 아마 지금 울리고 있는 사이렌 때문이겠지.
“지금… 무슨 일 났어?”
벨라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벨라는 일단 따라오라며 내 어깨 옷깃을 움켜쥐었다.
내게 상황을 설명해줄 사람은 벨라 밖에 없으니 잠자코 따라갔다. 미르도 파닥거리는 날갯짓으로 나를 뒤따랐다. 복도에 있는 토끼 인간들은 온갖 장비를 어깨에 짊어 메고 뛰어다녔다. 벨라는 복도 중간쯤에 붙어있는 어느 종잇장 하나를 뽑아 들었다. 그 종이에 적힌 내용을 벨라가 빠르게 훑어보았다.
무슨 무슨 편성표라고 적힌 종잇장이었다.
“그게 뭐야?”
“……”
손가락으로 종이 위를 짚어가며 천천히 글자를 따라가는 벨라가, 문장의 왼쪽 끝에 다다르자 입을 열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에반 소령님이 배치되어있습니다.”
배치?
배치되어있다. 그게 무슨 소리일까. 천장에서는 붉은 사이렌이 울리는 통에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제대로 들어오질 않았다.
“지금 바로 155-3 초소로 이동하셔야 합니다.”
“…? 엉?”
“그곳에 가셔서 대대 작전을 보조하라는 지시입니다.”
“아니 그게 뭔소리야.”
벨라가 한숨을 쉬며 설명해줬다.
“적이 관측되었으니 즉시 배치된 위치로 이동하여 방어를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적?”
내가 다시 한번 질문하자 벨라의 표정이 변해버렸다. 날 한심해하던 눈빛은 이미 짜증으로 바뀌었다. 나한테 화를 내거나 한 건 아니지만 더 이상 물어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가가 움찔거리던 벨라는 이내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고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일은 차차 설명해 드릴 테니 일단은 적혀있는 대로 움직이세요. 지금 바로 초소로 이동하셔야 합니다.”
“지금 그 종이에… 내가 거기로 가야 한다고 나와 있다는 거야? 그거 뭐 엄청 중요한 건가?”
“당연한 거 아닙니까.”
“……”
정신이 살짝 아득해졌지만 두 다리는 벨라를 따라 빠르게 걷고 있었다. 미르도 뒤처지지 않고 따라왔다.
벨라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은 지상에 있는 진지로 이어져 있었다. 또 그곳에서 여러 방향으로 뻗은 복도를 만났다. 그중 하나를 따라 걸었다. 처음에는 걸어갔지만 조금씩 벨라의 걸음이 빨라지고 나중에는 뛰어가고 있었다. 나도 벨라를 놓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 미르도 고개를 앞으로 쭉 빼고 빠르게 날갯짓했다.
몇 층의 계단을 더 오르자 벨라가 말한 155-3 초소가 보였다. 콘크리트 초소 벽면에 두껍고 큰 글씨로 적신 “155-3” 마크가 그곳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우리는 어느새 지하가 아니라 높은 절벽에 있었다. 초소는 높은 절벽 중턱에 위치했다. 고도가 어찌나 높은지 저 멀리 해안선이 보일 정도였다.
“여기 있으시면 됩니다.”
안내를 마친 벨라는 나와 미르를 여기 두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는 것 같았다. 난 왠지 모를 두려움에 벨라를 붙잡았다.
“그, 그럼 너는? 너는 어디 가는 거야?”
“저는 이베흐 님의 직속으로 배치되어있습니다. 저는 이베흐 님께 가야 합니다.”
“그럼 나랑 미르만 그… 여기에 있으라고?”
“네.”
벨라의 대답은 단호했다. 너무나 단호하고 완고한 얼굴빛에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벨라는 초소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이제 나와 미르만 이 진지 안에 남겨져 있었다.
진지 내부는 사면이 모두 콘크리트로 막혀있었다. 해안선을 향한 벽면에만 두 뼘 정도 될 거 같은 직선 틈이 보였다. 미르와 함께 그 틈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다가가 진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꺼운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초소는 주변의 바위와 동화되기 위해 밝은 회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워낙 높은 곳에 위치했기에 주변의 모습을 쉽게 살피기 좋았다. 빼곡한 주택들 사이로 커다란 포가 숨겨져 있고 모래주머니를 쌓아 만든 기관총 진지에 병사들이 배치되었다.
그럼 지금 상황은 무슨 상황이지. 아까 벨라는 적들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꺼냈었다. 그 생각을 하며 초소 밖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눈앞의 풍경에는 특별한 점이 없었다. 소위 ‘적’이라는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는 푸른 바다는 깨끗하게 비워진 상태였다.
뭔데. 적들이 어디 있다는 거야.
그러다 다른 초소들의 병사들이 바다가 아닌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도 따라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바다에 안 보이던 적들은 그곳에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그들을 자세하게 바라보았다. 즉시 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시그너스의 기사단도, 부송사 같은 도적단도 아니었다. 그것들은 ‘엘프’였다.
엘프?! 엘프라니. 큰 눈과 뾰족한 귀, 색칠한 것만치 하얀 피부를 볼 때 저들은 엘프가 확실하다.
엘프들은 하늘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날갯짓하며 날아오는 게 한 떼거지 나비 같기도 하고, 웅장한 대열을 이루며 다가오는 것이 마치 철새들의 비행 같기도 했다. 점점 다가오며 그 대열이 점점 넓어지고 중간중간 함께 떠오던 엘프 비공정들도 자리를 잡아갔다.
아니 근데 도대체어떻게 엘프가 실존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