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소설] 에반 키우기 1 (2)
2화
하늘을 살짝 올려다보며 고민했다. 새까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타고 남은 재가 바람에 날려 나풀거렸다.
난 이내 결심하고 말했다.
“…따라오세요.”
“응?”
“다음 마을로 안내할게요.”
수풀과 작은 오솔길을 지났다. 조금씩 내게 익숙한 그 길이 펼쳐졌다. 내 집으로 가는 길이다.
슬리피우드에서는 멀어졌지만 열기는 가시지 않았다. 이제보니 불타고 있는 것은 슬리피우드뿐만이 아니었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도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인다. 저기는 페리온쯤이려나. 온 사방의 수풀이 불타오르며 하늘을 검붉은 아지랑이와 탄 연기가 채워갔다.
온 빅토리아 아일랜드가 불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만큼 가족들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가족들을 챙기려면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바싹 긴장한 채 걸으면서도 두 발을 서둘러 내디뎠다. 당장은 총을 든 소녀를 이길 방법은 없다. 뒤돌아 반항하는 순간 방아쇠를 당길 거다. 하지만 딱 하나 나에게 유리한 구석이 있다.
그건 바로 지리.
그녀는 내게 길 안내를 부탁하고 있다. 아마 이곳의 지리에 관해서는 잘 모른다는 뜻이리라.
정신없이 발걸음을 옮겨 어느새 목장 울타리에 다다랐다. 내 허리 높이쯤 오는 나무 울타리가 보였다. 그 울타리 너머로 돼지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붉게 물든 하늘과 탄내가 이곳까지도 풍겨왔다. 돼지들도 익숙지 않은 분위기에 당황한 듯 보였다. 돼지들은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 상태로 눈알을 굴리며 눈치를 살폈다.
난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 왔어요.”
“응?”
“여기가 마을이에요.”
소녀는 주변을 차분히 훑어봤다.
“돼지들밖에 안 보이는데.”
그 말대로 주변에는 돼지만 수십 마리가 있었다.
“이 돼지 목장을 건너가야 마을이 나오죠. 따라오세요.”
“음…”
역시 살짝 의심한다. 소녀는 주변을 다시 한번 훑어봤다. 보이는 거라곤 돼지들과 목장, 그리고 우리 집. 어디에도 주택이나 마을 간판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이곳이 마을이 아니라는 걸 살짝 눈치챈 소녀는 딴지를 걸었다.
“좀 이상한데?”
난 곧장 화제를 돌렸다.
“아, 혹시 돼지들이 무서워서 그런가요?”
난 가볍게 나무 울타리를 넘어갔다. 그리고 울타리 근처까지 와있던 돼지를 향해 다가갔다.
“뭐해?”
“돼지들을 무서워할 건 없습니다. 보기보다 훨씬 얌전하고 깨끗한 놈들이에요. 말도 잘 듣고요.”
한 손을 뻗어 돼지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돼지에게서 떨림이 느껴졌다. 잔뜩 긴장해있다. 당연한 거지. 매캐한 탄내가 사방에서 풍겨오는 지금 같은 상황이 무섭지 않을 리 없다. 다른 돼지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소녀는 총구를 치켜들며 내 머리를 정조준했다.
“괜히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이상한 짓이란 건 눈치챘나. 하지만 이미 늦었다. 돼지들 사이에 있는 이상 여기는 내 땅이다.
“이잇…!”
난 재빨리 돼지의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 발끝으로 돼지에게 신호를 주었다. 돼지가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난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목청으로 내질렀다.
“전부 다 뛰어! 사방으로 흩어져!”
“뀌이이익!”
돼지들이 일제히 포효했다. 흥분해있던 수백 마리 돼지들이 동시에 발을 굴렀다. 온 사방으로 흩어지며 엄청난 흙먼지가 일었다. 그리고 엄니를 치켜든 채 달려 나갔다. 울타리도 뭣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돼지들의 앞에 부딪히는 건 속절없이 부서졌다. 총을 든 여자아이와 토끼 인간들도, 맹렬한 속도로 돌진해오는 돼지들을 피해 몸을 수그려야 했다. 발을 구르는 돼지들 때문에 온 사방에 흙먼지가 자욱해졌다. 내 쪽에서 총을 든 소녀와 토끼 인간들이 안 보일 정도로 빽빽했다.
지금이다. 이렇게 흙먼지가 날리면 총을 조준할 수 없다.
난 내가 타고 있는 돼지에게 작게 귓속말했다.
“넌 도망치지 마. 넌 우리 집으로 가. 냄새로 집 위치를 찾아.”
돼지의 후각은 개보다도 뛰어나다. 돼지들의 고성과 모래 먼지가 오가는 와중에도, 내가 타고 있던 돼지는 정확하게 집을 찾아갔다. 가로막는 그루터기나 울타리는 가볍게 뚫고 집 앞에 도착했다.
난 돼지의 귓속에 다시 한번 속삭였다.
“여기서 기다려. 내가 나올 때까지.”
그다음엔 문을 박차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 아빠!”
“……”
집 안은 고요했다.
“어딨어! 괜찮아?!”
빠르게 2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보이는 문은 다 열어 보았다. 복도 끝의 내 방에도 도착했다. 하지만 형도 엄마도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벌써 도망친 걸까. 다행히 집 안에 싸움의 흔적이나 총알 자국 같은 건 없었다. 아마 무사할 것으로 추정된다.
가족이 없는 이상 그곳에 내 볼 일은 없었다. 집 밖으로 나가려는데, 한가지 생각난 게 있었다.
드래곤 알.
난 침대 밑으로 바싹 기어들어 갔다. 은은하게 빛나는 드래곤 알이 보였다. 난 널널한 등산용 가방을 꺼내 들어 가방 에 알을 집어넣었다.
가방을 몸에 맞게 딱 맞추고 신발을 고쳐 신었다. 이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계단을 내달려 1층으로 돌아왔다. 황급히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가자!”
내가 타고 왔던 돼지는 명령에 따라 내가 나올 때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난 안도하며 돼지에 올라타기 위해 다가갔…
타앙-!
그 순간 또다시 어떤 폭음이 들렸다. 드레이크가 죽었을 때 들은 소리와 같았다.
이번에는 눈을 감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잔상조차 남기지 않고 빠르게 날아든 작은 총알이, 정확히 날 기다리던 돼지의 머리를 명중했다.
퍽하고 묵직한 소리가 나며 돼지의 머리가 날아갔다. 속에서부터 터져나간 것처럼 그 자리가 휑해졌다. 중심이 흔들리며 돼지의 몸이 기울어졌다. 이내 생명력을 잃고 한쪽으로 푹 쓰러졌다.
잔인한 장면에 내 발걸음이 멈춰졌다. 총성이 들린 방향을 천천히 바라봤다. 정면 12시 방향, 까마득히 먼 거리였지만 뚜렷하게 보였다. 불길들 사이로 다가오는 누군가가 있었다.
검은 제복 차림에 자신의 키만 한 저격총을 견착하고, 너무 강렬한 나머지 우아해 보일 지경의 발걸음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그녀가 보였다.
아까까지 내게 총을 겨누며 길 안내를 부탁했던 소녀였다. 어느새 모래 먼지는 전부 가라앉았고, 시야를 회복한 녀석이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어쩌지. 이제 어쩌지.
다른 돼지들은 대부분 집에서 멀리로 도망간 상태였다. 더 이상 모래 먼지를 날려줄 돼지들도 없다. 두 다리로 달려서는 내가 살아나갈 확률은 희박하다. 저 여자는 드레이크도 이번 돼지도, 모두 단발에 머리를 명중시켜 죽었다. 그것도 한참 먼 거리에서 말이다. 어설프게 도망치다간 나도 똑같이 머리통이 날아간다.
승부수가 필요했다. 저 살인 병기 같은 여자애를 이길 방법이 있어야 한다.
난 몸을 돌렸다. 내 집을 올려다봤다. 아직 우리 집은 크게 부서진 곳 없이 멀쩡하다.
저 여자는 당연히 나보다 강하겠지만, 내 집의 구조에 관해서는 잘 모를 거다. 그리고 집 안에는 식칼 같은 무기들도 많다.
집에서 싸운다면 내게도 승산이 있다.
난 집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부엌에서 쥐기 좋은 칼 한 자루를 챙기고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2층 내방 속으로 숨어들고 문 앞을 의자로 가로막았다. 그제야 벽에 기대어 호흡을 가다듬으며 싸움을 대비했다.
잠시 후 끼익- 하는 소리가 1층에서 들려왔다. 그 여자가 우리 집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였다.
좀 더 기다리자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난 나무로 된 작은 탁자를 집어 들었다.
마침내 그녀가 내방 문 앞에 섰다. 그녀가 문고리를 잡고 안으로 밀었다. 처음 한 번은 앞을 막고 있던 의자에 걸려 문이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여자가 문을 걷어차자 끼었던 의자는 뒤로 날아가고 여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의 빈틈도 주지 않고 내가 쥐고 있던 탁자를 그녀의 면전에 휘둘렀다. 비교적 공격 반경이 큰 탁자로 한 방 먹이고 주머니에 넣어놨던 칼로 마무리할 예정… 이었다만…
그녀는 믿기지 않는 반응속도를 총의 개머리판을 이용해 내가 휘두른 탁자를 받아쳐냈다. 하는 수 없이 주머니에 칼을 빼들어 달려들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파고든 그녀의 주먹이 내 턱과 목을 가격했고, 내가 균형을 잃고 앞쪽으로 쓰러지자 한쪽 다리를 들어 내 안면에 발차기를 뻗었다. 맞는 순간 숨이 턱 끊겼다.
직후에 어딜 맞은 건지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빠르게 몇 번의 공격이 더 들어왔다. 난 손에 쥔 칼도 놓치고 다시 일어날 상태도 못 되었다.
“으… 으윽…”
난 쓰러졌다. 흐릿해진 시야로 올려다본 그녀는, 사람이 아닌 것만큼 무심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심한 고통과 어지러움을 느끼며 내 몸에 힘이 풀렸다. 마취총이라도 맞은 것처럼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 / / /
의식이 돌아왔다. 난 드래곤 알이 들어있는 가방을 끌어안은 채로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지독한 가위에 눌렸다 깨어나는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비틀거리며 바닥을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간신히 돌아온 시야로 주변을 살펴봤지만, 이곳은 내가 아는 장소가 전혀 아니었다.
일단 이곳은 실내였다. 천장은 큰 강당처럼 높았다. 바닥, 벽, 천장 사면이 모두 두꺼운 진회색 금속으로 되어있었다. 방 중앙에는 붉은색의 기다란 카펫이 깔려있다. 벽면에 일렬로 설치된 흰색 조명이 빛났고 방 전체에 웅웅거리는 기계음과 약간의 진동이 울렸다.
여긴 어디지, 난 왜 여기 있지. 몰려오는 불안감에 숨소리도 조심스러워졌다.
그 광경에 압도당하던 중에, 무겁고 중후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그 방향으로 내 고개가 돌아갔다.
백발이 된 머리를 볼 때 그의 나이는 중년 이상으로 보였다. 하지만 역삼각형으로 딱 벌어진 어깨나 제복 위로 드러나는 진한 근육 선들을 볼 때 그는 전혀 노쇠해 보이지 않았다. 이마가 드러나는 올백 머리에 새까만 선글라스와 두툼하고 단단한 팔뚝에서는 위압감마저 느껴졌다. 그런 그가 금속으로 된 직사각형 탁자 너머에 앉아 있었다.
반사적으로 질문이 튀어나왔다.
“누, 누구시죠.”
“저는 블랙윙의 사령관 이베흐 원수입니다.”
그는 자신을 소개했지만 그가 뭘 하는 사람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이베흐가 손을 살짝 뻗어 내 왼쪽을 가리켰다. 그쪽에는 총을 든 소녀가 서 있었다. 그녀는 아까까지 내게 총을 겨눠 길 안내를 부탁하고, 마지막엔 주먹으로 날 때려눕혔던 바로 그 소녀였다.
이베흐가 설명했다.
“그녀는 벨라 상사입니다. 당신을 이곳으로 데려왔죠. 데려오는 과정에서 약간의 폭력이 수반되었던 것 같은데, 이는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난 그 누군지도 모를 남자의 말 따위 귀담아듣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천천히 오른쪽으로 옮겼다. 둥근 톱니가 달린 철제 문짝이 보였다. 여차한다면 그 문을 열고 도망칠 요량이었다.
하지만 난 이베흐라는 남자를 너무 얕잡아보고 있었다. 이베흐는 문짝을 향하는 내 시선을 정확하게 읽어냈다.
“도망치실 생각이십니까.”
“……”
이베흐가 작게 웃었다.
“벨라. 열어서 보여드려.”
방금까지 내가 바라보던 문짝을 향해 벨라가 다가갔다. 톱니를 반바퀴 돌려 잠금을 풀고 그 문을 열었다.
“……!”
열린 문 너머로는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땅은 보이지 않았다. 동시에 맹렬한 바람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베흐가 그 광경을 설명했다.
“여긴 비공정입니다. 제 지휘 기함이죠. 현재 상공 육백 미터 위를 날고 있습니다. 괜히 도망치실 생각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비공정이란 날아다니는 함선을 뜻한다. 바다 위를 떠다니는 배들과 기본적인 모양은 비슷하다. 이 비공정이 하늘을 날고 있으니 이베흐의 말처럼 내게 퇴로는 없었다.
벨라가 다시 두꺼운 철제문을 닫았다. 바람 소리가 사라지고 내부는 고요해졌다.
이들에게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게 확실해지자 난 대화를 택했다. 난 아까 했던 질문을 되풀이했다.
“당신은… 누구죠…”
“저는 에델슈타인에서 이곳으로 파견된, 블랙윙의 원정 작전을 총괄하는 사령관 이베흐 원수입니다.”
이베흐는 아까 했던 대답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그가 하는 이야기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블랙윙?
빅토리아 아일랜드에는 시그너스 기사단 말고 다른 군대가 없다. ‘블랙윙’이니 어쩌니 하는 이름은 아예 처음 들어봤다. 따라서 저들은 다른 대륙에서 넘어온 군인이었다.
이제야 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입고 있는 제복의 양 어깨에는 검은색 별 표시가 달려있었다. 각각 5개씩 달려있었다. 저 조그마한 어깨 견장에 별 5개를 꾸역꾸역 박아놨다니. 난 계급체계에 관해 잘 모르지만 꽤 높은 사람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군인이라면, 빅토리아 아일랜드가 불타고 있는 아까 상황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거다. 난 그들을 경계의 눈초리로 노려봤다. 무기는 한 자루도 없었지만 몸을 낮추고 싸울 태세를 갖췄다.
이베흐는 이번에도 내 그런 태도를 읽어냈다.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 아니니까요.”
어렴풋한 미소를 띤 그의 표정. 난 본능적으로 저 말이 거짓이라고 느꼈다.
난 경계를 늦추지 않고 말했다.
“지상에서 불타는 마을들을 봤습니다. 당신들이 벌인 일이지 않은가요.”
이베흐가 자신의 백발을 긁적였다.
“아하하, 약간의 오해가 있군요. 지금 빅토리아 아일랜드가 공격받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공격한 건 저희가 아니에요.”
“……”
“마을을 불태우고 있는 건 ‘부송사’라고 부르는 도적단입니다. 약탈과 방화를 망설이지 않는, 아주 질 나쁜 도적들이죠. 저희 블랙윙은 부송사 일당으로부터 빅토리아 아일랜드를 지켜주기 위해 이곳에 온 거고요.”
처음에는 딱히 이들의 주장을 들어줄 생각도 없었다. 앞뒤가 어찌 되었건 수상한 사람들이었다.
이베흐는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부송사는 이번에도 효과적 약탈을 위해 마을을 보이는 족족 파괴하고 불태우는 중입니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하고 있어요.”
여전히 이베흐의 말을 믿을만한 근거는 없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총과 포를 주로 사용하는 집단입니다. 근데 불타는 마을에 총알 자국이나 탄피가 있었던가요? 없었을 겁니다. 저희는 마을을 공격하지 않았으니까요.”
불타던 슬리피우드의 모습을 돌이켜보았다. 거기에 총알 자국이 있던가. 워낙 정신없던 상황인지라 잘 기억나지 않는다.
현재로서 이베흐의 말을 믿어줄 근거는 없었지만 반박할 근거도 없었다. 그리고 반박할 필요도 없었다. 어쨌든 난 이들이 누군지 관심 없다. 난 내 목숨만 부지할 수 있다면 그만이다.
내가 목소리를 살짝 키워 물었다.
“그럼 저는 왜 여기로 데려온 겁니까.”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이베흐가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에반입니다.”
“알겠습니다. 에반. 저희는 당신을 블랙윙에 스카우트하고 싶습니다.”
“……?”
너무 뜬금없는 소리라서 그게 무슨 의미인지 종잡을 수도 없었다.
내 심경과는 상관없이 이베흐는 본론을 얘기했다.
“저희 블랙윙은 정의로운 사회의 확립과 균형 수호를 추구하는 군사 조직입니다. 블랙윙이 메이플 월드에서 대업을 이룰 수 있도록, 에반님 같은 뛰어난 인재를 저희 블랙윙에 합류시키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헛소리입니까.”
이베흐가 자신의 검은 강철로 된 집무 탁자를 옆으로 돌아 나왔다. 그 앞으로 한 발짝 걸어와 말을 이었다.
“아까전에 벨라의 추격을 따돌리셨다고 들었습니다.”
“……?”
난 내 오른쪽을 살짝 돌아봤다. 내게 총을 겨눴던 저 소녀의 이름이 ‘벨라’인 것으로 보인다. 난 돼지들을 이용해 저 살인 병기 같은 여자를 거의 따돌릴 뻔했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
“벨라는 뛰어난 저격수입니다. 당신 같은 민간인은 벨라의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주변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영리하게도 벨라에게 반격했습니다. 심지어 꽤 성공적이었죠. 그건 엄청난 일입니다.”
“……”
“눈여겨볼 것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벨라를 따돌린 다음에, 무작정 도망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었죠?”
이베흐의 말대로 난 내 가족들을 살피기 위해 내 집으로 향했었다. 이베흐는 그런 내 의도도 정확하게 읽었다.
“굳이 집에 들렀던 것은, 가족들의 상태를 걱정하는 마음에서였지 않습니까?”
“……”
“상황의 경과도 모르고 본인의 목숨도 부지하기 힘든 상황에서 가족까지 생각하는 정신력이라니. 저희 블랙윙에서 추구하는 높은 기개에 아주 잘 부합합니다.”
“……”
뜻밖에도 여러모로 칭찬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기분이 좋아지지는 않았다. 예상외의 호의에 오히려 경계가 더 심해졌다.
“겨우 그 정도 이유로 절 스카우트 하겠다는 말입니까…?”
“이것들 말고도 한가지 결정적 이유가 있습니다.”
“…뭡니까.”
이베흐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이베흐의 표정은 한층 더 밝아졌다. 그 밝은 표정에는, 다음 말을 꺼내면 내가 틀림없이 기뻐하리라는 확신이 담겨있었다. 숨 한 모금을 크게 들이쉰 이베흐가, 마치 날 축하해주기라도 하듯 붕 뜬 목소리로 말했다.
“에반님에게서 강한 마법적 재능이 느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