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이곳이 어디인지조차도 알 수 없는 공간에서.
오로지 미약한 감각만이 남은 상태로 무한한 공간 속 가득한 어둠을 밝히고 나아간다.
영겁의 시간이 흐른 듯,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만이 가득한 신전.
{나의 아이야.}
누군가의 속삭임과 함께 이루 말할 수 없는 신성이 신전을 맴돌았다.
{너는, 구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느냐?}
거대한 신상 앞의 한 존재가 그의 말을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목소리에 담긴 전생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끝없는 신성.
그것으로 나는 직감했다.
그 목소리가 곧 '구원자'라는 것을.
'돌로 된 신상이 눈을...떴다고?!"
신상의 닫힌 눈꺼풀이 열리고 붉은 눈동자가 깊은 번뇌를 흘렸다.
"갓 블레스 유."
작은 존재는 석상의 앞에서 무릎꿇고 앉아 기도했다.
...
"나 피 묻은 예복을 걸치고 주의 앞에 당도하니."
작은 존재가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기꺼이 구원을 받아들이리라."
작은 존재의 눈물이 땅바닥에 떨어지고 작은 존재는 기도를 끝마쳤다.
작은 존재가 황홀한 표정으로 두 팔을 높이 들자, 신상의 손끝이 빛나며 작은 존재를 집어삼켰다.
그 이후로는 그저 그 과정의 연속이었다.
그의 눈앞에 당도한 존재가 그에게 기도하고, 거대한 신상이 그들을 집어삼킨다.
가끔씩 몸을 움찔거리거나, 식은땀을 흘리는 자들도 여럿 있었지만, 그들 또한 마지막에는 태연한 표정으로 구원을 받아들였다.
{나를 지켜보는 나의 아이야.}
목소리가 나를 인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속삭여왔다.
{이는 네게 아직 이른 모습일지니.}
{나의 힘을 모두 모아.}
{시작의 때로 돌아가거라.}
목소리의 끝맺음과 동시에 갑작스레 쏟아진 졸음에 나는 눈을 감았다.
"그저 아무 의미도 없던 허상이었던가?"
내가 눈을 뜬 곳은 객실의 내부였다.
'그럴 리는 없겠지..'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생생한 경험이 한낱 꿈일리는 없었으니까.
'모든 일을 마치고...쉴 일은 없겠군."
창조주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접했을 때에는 압도적인 존재에 대한 경외심마저 들 정도였다.
"주께서 말미암아 태초의 때로 돌아가라 명하셨으니.
세계에 구원이 도래할 때가 다가왔노라."
내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이자 머리 위로 물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온다.
기분이 심란했다.
다시 세계를 무(無)로 되돌린다.
사라질 것이었다.
시야 너머로 느껴지는 풍경,
모든 존재들.
나아가 나 자신까지.
솔직히 말해 두려웠다.
나는, 용자의 탈을 뒤집어쓴 겁쟁이일지도 모른다.
진정한 용자라 하기에 내 자질은 부족했으니까.
나는 쭉 뻗은 손을 멍하니 쳐다본다.
곧게 펼쳐진 손 위로 자라난 주먹을 꽉 쥐어 보이고는 가벼운 정권을 내지른다.
아마 흥분된 마음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행동한 것이리라.
매달려 있었다.
작지도 않았다.
크다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보통이냐고 묻는다면, 그제서야 정답이라 말할 수 있었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이 손에.
모든 '세계'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
그것을 생각하니 마음 한켠의 명암이 진해져가는 것만 같았다.
세계의 구원을 포기하고 평범한 삶을 영위하느냐.
아니라면 세계에 등을 돌리고 홀로 나아가느냐.
"...주께 신앙의 증명을."
어려운 선택이었지만, 결과는 도출되었다.
내가 선택한 길은 후자였다.
이것이 모두를 배반하는 선택이 되더라도..그에게만큼은 등을 돌릴 수 없었다.
어둡게 빛을 뿜어내는 반월을 따라 신성의 장검이 공명했다.
처음은, 가느다란 장검이었다.
첫 번째 신의 조각.
가느다란 축복은 구원자의 편린이었다.
손에 쥐어진 블레스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몸부림쳤다.
"모든 아티팩트를 모아야 하는 건가."
그렇게 된다면야 리엘의 심장조차 바쳐야 하는 날이 언젠가는 오겠으나, 그것이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격변이 시작되는 때.
나아가야 할 때였다.
주의 황혼(黃昏)을 향해서.
14화
'언젠가는 끝내야 할 때가 오리라.'
내가 다시 한 번의 생을 부여받은 걸로 보아, 전생의 내가 세계를 구원하는 데 실패했거나, 또는 새로이 시작된 이 세계에 내가 불러들여진 걸지도 몰랐다.
'한 잔 해야겠군'
원초 나는 술을 잘 마시는 성격도 아니었거니와 술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이 기나긴 밤은 결코 내가 조용히 넘어가게 하려 두지 않았다.
또르륵, 하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입안이 씁쓸했다.
나는 어둑어둑한 반월을 올려다본 뒤, 투명한 술이 찰랑이는 술잔을 말없이 들이킨다.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어온 액체는 여전히 씁쓸했다.
나는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모든 것을 결심한 이후로도 내 마음은 결코 편치만은 못했다.
그저 계속해서 고뇌할 뿐.
탁한 술기운이 목을 타고 머리까지 올라왔다.
울적한 기분을 달래고자 나는 다시금 술잔을 채웠다.
술잔이 거의 바닥을 보이고, 나는 바닥에 술 몇 방울을 흘렸다.
일종의 의식이었다.
귀환을 간곡히 기원하는.
술로 물든 바닥의 얼룩을 마력을 사용해 닦아낸다.
원래의 의미대로라면 귀환을 소망하는 것이겠지만..
이 의식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내 눈꺼풀이 감겼다가 떼어진다.
사라졌다.
세상을 비추는 빛이 사라진 뒤 나타나곤 다시 사라졌다.
"음..."
나는 창문을 앞에 두고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이 서로를 마주하게 한 채 주위의 마력을 컨트롤하자.
창조자의 기운에 반응한 마력의 파편들이 나를 주위로 해서 몰렸다.
나는 눈을 감고 밤을 지새웠다.
이대로 영원한 안식에 들기를.
진정 주께 구원받았으므로.
그 어떤 '죄악'도 없으며.
그 어떤 '상념'도 없고.
그 어떤 '고통'도 없으리.
"아아..."
태양의 여명과 관능이 젖어드는 아침.
눈가를 가득하게 채우는 눈물을 닦아내고 여관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상하군.'
어제까지 그녀가 머물던 여관의 뒤편에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마치 일부러 나를 유인하기 위해 남겨 놓은 듯, 진한 마력이 누군가 이동한 궤적을 따라 길을 잇고 있었다.